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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시골생활

국제커플 로서 결혼20년 기념일이란

by 검은양(黑未)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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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내가 따르던 순이 언니의 시집가던 날의 풍경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려진다.

동네에서 제일 큰집에 살던 순이언니는 우리가 떼 지어 소꿉놀이 할 때 직접 만든 떡이나 여러 가지 간식들을

만들어주곤 했다.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조근조근 우리의 질문에 답도 잘해주었으니 내 또래의 친구들은 다 좋아했지만 불친절한

가족 속에 있었던 내게는 내 마음에 가족이었으면 하는 특히나 더 좋아하는 맘이 큰 사람이었다.

엄마가 잔칫집에 일을 거들러가실때 따라가서 그녀의 결혼식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떠들썩하게 모여 신랑신부

얼굴 구경하며 웃고 있었지만 한구석에서 순이언니와 그녀의 친구들은 눈물을 흘리고 닦고 하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눈으로 들어온 그 눈물은 이상해보였고 충격적이었다.

 

결혼식 이퀄 슬픔 이라는 공식이 내 머릿속에 박힌 날이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나를 지배하던 결혼에 대한 부정성은 다른 친구들의 결혼식에 열서너 번을 다녀오면서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식장에서 낄낄대었고 하하호호 하며 신나 했다.

그리고 행복하다고 말하며 세상에서 주인공이 된것같으며 완벽한 내편이 생겼다는 안정감이 온다고 했다.

참으로 그 좋은 결혼 은 사람으로서 해봐야 하는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결혼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어찌 결혼을 혼자 하는 가? 결혼식에 그렇게 쫓아다녔어도 남자를 만나지를 못했다.

더 솔직한 말로 그들로부터 흥미를 끌지 못하였음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다 인연을 만난 곳이 지하철 역이 이어지는 지하도였고 길을 물어보는 일로 시작되어 이후 주저리주저리

흙속의 감자가 줄기에 이어지듯 연결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만들어지면서 끝내 결혼으로 스토리가

끝맺음이 되었다.

나는 한편으로 지극히 보수적인 사람이었는데 적어도 나의 남편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리고 군필자

여야 한다는 나름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신조는 동생의 혼인상대에게까지 들이대어 꼰대소리 제법 들었다.

이러던 내가 결혼을 할 사람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몹시도 불편하고 넘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그간 나가 저질런 업 이라 시지프스 가 돌을 지고 산을 오르듯이 내 스스로가 짐을 지고 날라야 할 것이었다.

국제커플로 산다는 것은 결혼은 남녀가 달라서 오는 괴리감으로도 힘들지만 사는 곳까지 달라지면 힘듦은

두 배가 된다.

 

사는 터전을 옮겨 사는 것을 흔히 나무에 비유하는데 정착하는 과정이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모습과 흡사하니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처음 결혼을 하고 일상이 시작되니 달라도 너무 다른 생활방식이 낯설어서

많이 힘들었다. 비교적 도전적이고 서양식 사고를 지녔다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문화충격에서는 덜

부담스러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개인적 일상을 공유하는 부분에서의 문화차이는 책에서나 배울법한 것들과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의 의견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가령 무엇을 하고 싶냐? 어디를 가고 싶거나 먹고 싶다거나? 너의 계획이 무엇이냐?라는 것들 로서

대부분이 나는 그냥, 혹은 아무 데나, 대충, 이 대답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늘 충돌을 겪었고 남편은

내가 대답을 못하는 것에 대해 온화하게 혹은 단호하게 얼굴을 마주 보고 왜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하는지

설명을 했다. 그땐 그런 설명들이 일방적으로 나를 무시한다고 느껴져 심한 모멸감을 받아서

화 반잔뜩 날 뿐이었다.

 

명확한 자기 의견과 주장, 이것은 어쩌면 해외살이에서 기본적으로 장착을 해야 권리를 찾을 수 있고

외국인로서 무리 없이 본사회에 적응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후에나 알게 되었다.

부부가 되었을 때 이러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조언은 자존심에 가로막혀 좋음을 느끼기가 쉽지가 않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 배우자가 외국인이라서 일상의 아쉬움을 보자면

 

1. 자라온 환경이 현저히 달라서 서로 유년시절 공유가 안된다

2. 언어문제가 가장 큰 문제 이긴 한 부분은 아무래도 자국민끼리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표현의

공감은 다 큰 어른이 배운 언어로서는 커버가 안된다.

3. 음식 역시 나이가 들수록 고국의 향토음식에 대한 갈망이 많아진다.

위장이 자꾸 된장 김치를 외쳐대고 매운 음식의 중독성은 이곳의 어떤 맛있는 음식이 이겨내지 못한다.

( 난 치즈를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운 어떤 한국음식은 그 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빵과 밥의 통합은 잘 안된다. 따로국밥으로 먹게 될 경우가 많다. 음식의 차이!

4. 말하지 않아도 문화적으로 알 수 있는 무형의 것들이나 감정이 통화지 않는다.

(신조어를 사용하며 티키타카 하는 그 통쾌함 못 누린다.(이건 내가 언어부족이라 더더욱 불가능하여 많이 아쉽다.)

 

함께 산지 20년 이 된 지금 국제커플로 살아가기란

익숙해지기, 적응하기, 수용하기 그리고 서로 지극히 이해하기 의 연속이다.

이토록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거라고 생각된다.

이제는 나의 생각이나 의견을 똑부러지 말하게 되어 마치 나무에 새긴 전각처럼 나라는 인물이

더욱 부각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변화를 시켜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그런데 한 20년 살고 보니 외모는 달라도 사람은 똑같다는 게 진리이다.

어떨 땐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그에게 말할 때가 있다.

내가 독일에 적응해 나가는 만큼 남편도 나의 문화에 녹아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지난 20년 동안의 녹록지 않았던 시간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서로가 사랑으로 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최서우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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